순욱의 말년 N.O.T.E





지난번 포스팅에도 말했지만 순욱 없는 위나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위나라는 영천에 지역 기반을 둔 사족 세력의 협력으로 건국될 수 있었고 the 영천 사족의 영수가 바로 순욱이었으니까 =3= 그러나, 유능한 영천의 사족들을 조조에게 공급했다는 공을 제외한, 순욱 개인의 공훈은 생각보다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순욱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작성한 문서를 직접 소각했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순욱의 계책이나 간언한 내용, 추진한 정책, 행적 상당수가 유실됐다.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는 것을 명예로 아는 당시 귀족들의 정서에서 보면? 순욱의 말년에 뭔가 큰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3= 그리고 큰 문제란? 알다시피 국공(國公)에 오르네 마네를 두고 발생한 조조와의 신경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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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면.. 참 이상하지 않은가 - 순욱은 지금까지 조조를 위해서 각종 계책을 냈고. 순문약(순욱)이 하신 말씀들을 보면, 이 계책을 시행할 경우 수혜를 입는 대상은 한(漢)도, 한나라 황제도 아닌 명공(조조)이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문약이 인생 말년에 갑자기 조조의 위국공 취임을 반대하는 행동은, 이상하게 보일수도 있다. 마치 지금까지 정도전이 이성계를 잘 돕다가 막상 공양왕이 선양을 발표하자 정도전이 울며불며 반대하는 모양세랄까... =3= 

조조도 아마 순욱이 국공 문제를 두고 자신과 충돌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불과 몇년 전에 조조가 자신의 딸을 순욱의 첫째 아들 순운에게 시집보내 두 사람은 사적으론 사돈 관계였다. 참고로 조조에겐 최소 두명 이상의 딸이 있었는데 (이 시대 기록이 워낙 부족하여 조씨 일족의 가족 관계도 불분명한 구석이 있다) - 한 사람은 순운에게, 한 사람은 효헌제 유협에게 시집갔으니.. 조조가 순욱을 정말 극진히 신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결론부터 내면, 순욱은 근본적으로 조조와 한(漢)의 공존 체제를 찬성한 - 보수적인 형태의 도덕을 지지하는 유학자, 정치인이었고 이런 순욱의 이중적(?)인 태도는 그 시대를 이해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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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에도 몇번 이야기를 했지만, 한(漢)에는 황제가 일찍 즉위하고 일찍 사망하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황제의 권력을 대리하는 강력한 신하의 존재가 황실과 함께했다. 이런 대리인을 보정대신(輔政大臣)이라고 하는데 - 여태후, 곽광, 왕망, 두헌, 양기, 하진, 동탁... 다 보정대신입니다 (단, 여태후는 섭정이란 개념에 더 가깝지만). 원래 전한(前漢)의 효무황제 유철이 죽으면서 황제의 외척이 어린 황제를 보필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나라 역사 최초의 보정대신으로, 외척이었던 곽광이 맡아 외척보정이라고 불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외척이 아닌 다른 출신의 인물들도 보정대신이 되곤 했다. 

보정대신은 나라의 군사권을 위임받으므로 주로 대장군이 임명되거나 대장군에 임명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한나라에서 장군은 자신의 막부를 개설하고 자신을 보필할 막료를 선발하는 권리가 있었으므로. 원칙상 보정대신은 황제를 보필해야만 했으나 이들이 하라는 보필은 안하고 자기 세력만 늘리는데 급급하여 결국 한나라가 그 모양 그 꼴이 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제도는 특별히 개혁되지 않고 후한 말기까지 명맥을 유지했다는 말씀 =3=

그러니까 황제가 있으나, 황제의 권력을 다른 누군가가 대리하는 체제는 후한 말기에는 상당한 역사가 누적된, 나름 뿌리 깊은 제도였다. 조조 역시도 그런 의미에서 보정대신이며. 촉(蜀)에도 제갈공명, 강백약 등도 그 역할을 맡았고. 오(吳)는 제갈각, 손준, 손침 등이 그런 역할을 맡았다. 중국 황제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 것 같지만.. 그건 수나라 이후의 일로, 중국 중세에서 황제의 권위는 취약한 편이었다. 5호 16국 시대에서 황제들 줄초상 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는가. 다만, 조조는 외척이 아닌 환관 집안의 군인이라는... 당시로선 꽤나 독특한 배경을 가졌다는 특이점만 있을 뿐이지.

이 보정대신의 역사적 근거는, 중국 유학자들이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 여겼던 주나라 시대까지 올라가고. 공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은 주공 단이 어린 조카를 섭정하며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 조카가 장성하자 군말 없이 물러난 역사에서 유례된다. 조조 역시도 "내게 천명이 있다면 난 주공 단이 될 것이다" 같은 드립을 치기도 했고. 참고로 조선에서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정권 장악하자 집현전에서 수양대군을 주공 단에 비교하는, 누가봐도 아첨의 목적이 분명한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어쨌든

순욱은 정말 순수하게도, 조조가 주공 단의 신분에서 족함을 알고 물러날 거라 믿었고, 또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체제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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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후한 말기에 황건적이나 동탁 등의 준동으로 중국이 분열됐으나 - 중국의 사족들은 이 분열이 일시적이며 천하는 조만간 다시 하나로 통일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또 그들도 통일을 위해 분주히 노력했다. 사실, 전한(前漢)이 왕망에 의해 망했으나 15년만에 후한(後漢)이 부활한 것처럼. 동탁을 왕망에 견준다면 이 혼란이 단기간에 회복되리란 믿음도 헛되지는 않았다는 말씀 =3=  

그러나 금방 통일될 것만 같았던 중국의 분열이 장기화된 원인은 -- 조조가 208년에 적벽대전에서 패해 발생한, 당시 다수의 지식인층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의한 것으로. 만약 조조가 적벽에서 이겼다면, 후한은 동탁이 죽고 30년도 되지 않아 부활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반동탁 제후 연맹군이 동탁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싸워 동탁을 잡았다면 분열 자체가 아예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족들이 적벽대전 전까지는 여전히 한(漢)을 그리워하고, 한(漢) 체제로 편입되길 원했는데. 정사 삼국지를 보면 조조가 황제를 보호하고 있어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여론에 힘 입어 형주는 통째로 조조에게 넘어갔고, 오환족도 (원소에게 그렇게 이것저것 받았음에도) 조조에게 항복하고, 양주(손권)도 넘어갈 뻔 했다가 주유, 노숙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없던 일이 됐던 것. 량주(마등)와 익주(유장)도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순욱의 예측대로 한나라 황제가 가지는 파급력이 엄청났던 것.

그러나, 조조가 적벽에서 패배하면서 조조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제도를 바꾸기 시작했고 여기서 사족들이 조조에게 적극 협력하는데... 과연 조조가 먼저 마음을 바꾸었는지, 사족들이 먼저 마음을 바꾸었는진 누구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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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가 원래 황제가 되려고 했거든. 그런데 원소가 황제가 되려고 했을 때는 많은 사족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원소가 단념했는데.. 그게 불과 30년도 되지 않아 동소가 조조의 국공 취임 여론을 주도할 때는, 수많은 사족들이 찬성했다. 적벽에서 조조가 패배하자 중원 사족들은 분열의 시대가 더 지속되리라 여겼고. 역설적으로 한(漢)과 조씨의 위험한 공존보다 조씨로 하여금 한(漢)을 대체하게 하여 국가 권력을 단일화 하는 편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적벽대전이 공교롭게도 조조의 권위를 깎기는 커녕, 조조의 권위를 더 강하게 만든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순욱은 여론을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자였고.

적벽대전 전후로 손권, 제갈공명, 노자경(노숙), 주유처럼 분열주의자 - 조조가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경쓰지 않거나, 이제 한(漢)은 망했으니 우리끼리 독자적 노선을 걷자는 인물들이 역사에 전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주로 조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남방 일대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위험한 견해를 피력하곤 했는데. 한숭, 괴월처럼 한(漢) 체제를 인정하는 남방 사족들이 이미 조조에게 투항하여 북방으로 이주했고, 결과 남방에는 상대적으로 위험한 사람들만 남았던 것 같다. 유비나 손권은 이들을 발탁해 자신들의 철학적 정통성을 마련하는데 활용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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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과 남방의 여론이 모두 한(漢)을 버리자는 쪽으로 급격히 회전하고 있을 때 - 문약은 그래선 안된다고 외쳤다. 보면 순유까지도 조조의 국공 취임에 찬성해 승승장구했고 순유가 죽자 조조는 순유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까지 내렸거늘. 순욱이 여러 인재를 위나라에 천거했는데 그들 다수도 조조의 국공 취임에 찬성하거나 순욱처럼 적극적으로 반대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순욱이 영천 사족의 영수였지만 동소의 연판장 한방에 순식간에 고립됐고 수춘으로 좌천성 발령을 받아도 누구 하나 순욱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수춘 발령이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냐면.. 이건 촉나라로 치면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이제 성도에서 당신 할 일은 없으니, 저어기 강릉으로 가서 손권이나 잘 감시하시게" 라고 보내는 것과 같았다. 지금까진 조조가 원정을 나가면 순욱이 허도를 지켰고 이것은 조조가 순욱을 굉장히 믿었다는 뜻이다. 조조는 자신이 진심으로 신뢰하는 하후돈에게 본진 방어를 맡겼는데 하후돈과 조조는 서로 사실상 가족 같은 구면이기라도 했지, 순욱은 외부인이었다... =3=

아마 순욱조차도, 조조가 적벽에서 패할 줄은 몰랐고, 적벽의 패배가 조조의 권력 강화와 한-조 공조 체제의 붕괴라는 여론을 급격하게 일으킬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다수의 사족들은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마인드로 한나라를 쿨하게 버렸다면 순욱은 자신의 양심을 버릴 수 없었달까. 한헌제와 유비조차도 순욱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는데 어쨌든 그렇게 순욱은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덧글

  • 2019/10/10 07:43 # 삭제 답글

    애초에 영천 사족 출신인 순욱이 한에 대해 충성심을 보이는 건 당연한 것 같고 조조가 황제를 휘둘러도 한이 유지된다면 괜찮다고 보았던 것 같네요.
    하지만 조조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거기서 한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 견적이 나온다고 봅니다.

    아마 순욱이 지금으로 치면 참된 보수인사이지 않을까 생각드네요.
  • 말초 2019/10/10 09:09 #

    사족 세력은 원래 한나라, 라는 체제 하에서 성장한 세력이므로. 급진적인 혁명을 반대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당연히 한나라 체제가 연장되길 원할테고. 적벽대전으로 그게 힘들 것 같으니 권력은 단일화하되, 체제는 연장하는 --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만 바꾸자는 거죠. 정책은 전임 정권이 하던 거 그대로 하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평소에 맨날 한나라, 국가, 충신.. 그런 말들을 열심히 떠들었어도 결국 한나라 황제를 졸로 보고 있었다는 뜻이옵고.

    순욱은 그래도 한나라 황제의 전통과 공훈, 의미를 인정하자는 쪽이었죠. 순욱이 죽자 효헌황제가 울었다는 기록도 있고, 순욱한테 된통 털렸을 유비도 "늙은 도적(조조)이 죽지 않았다" 라면서 분통을 터뜨렸다고 하니. 적어도 사마부처럼 위선적이진 않았고 진정성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순욱은 한나라와 조조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제도를 마련하지 않고, 그걸 자신의 능력과 조조의 양심에만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마 순욱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공존 체제는 제갈공명과 유선, 강유와 유선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만. 촉나라는 처음부터 실권을 재상에게 몰아주고 황제는 종교적인 행사와 정치적 상징성만 남겨서.. 굳이 황제 자리를 노릴 필요가 없게 단도리를 해놨거든요.

    그런데 순욱은.. 그냥 자신의 중재력으로 그걸 커버하려고 했고, 상당히 잘했지만. 연속성이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는 거죠. 아니면 조조 사후에 유씨가 조씨 일족의 주살을 시도하던가 =3=
  • 2019/10/10 11:58 # 삭제

    동의하게 되네요.
    다른 블로그에서 순욱이 조조가 곽광처럼 행동하는 걸 용인했다고 표현했는데 말씀하신대로의 문제가 있죠.
    결국 조조가 욕심을 내면 붕괴할 시스템이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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