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대전 비평 N.O.T.E





원래 저수와 전풍 특집을 준비했는데 - 막상 글을 쓰니 관도대전 분량이 늘어나서 글을 쪼개 관도대전부터 올리고, 나중에 저수와 전풍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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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0년, 북방에 적이 없어진 원소는 허도를 목표로 남진(南進) 하고 (관도전쟁), 전풍과 저수는 각종 계책을 냈으나 원소는 모조리 무시한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안된다. 원소는 10만을 동원할 수 있었고 조조는 1만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 2할은 부상자였다. 누가봐도 원소에게 유리한 판에서 전풍과 저수는 무엇을 근거로 관도전을 반대하고 장기전을 주장했단 말인가.

일단, 관도전쟁은 생각보다 원소에게 쉽지만은 않았다. 조조 입장에서 원소가 거대한 적이었다면, 원소 입장에서도 조조는 무서운 적수임에 분명했다. 일단 조조는 남방(南方)의 많은 제후들을 꺾어버린 역전의 명장이었고 (조조가 꺾은 제후들 중에선 여포, 이각, 도겸처럼 소싯적에 싸움 좀 한다는 양반들도 있었으나 모두 조조에게 털렸다). 관도전쟁은 관도만이 아니라 백마벌, 연진, 여남 등. 조조의 영지와 국경 전역에서의 크고 작은 국지전으로 구성된다.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선빵을 친 사람도 원소가 아니라 조조였는데 -- 조조는 천자의 군대라는 명분을 확보한 상태에서 원소를 역적으로 몰기 위한 여론 공작을 이미 시작했고 (원소가 직접 상주문을 올려 이런 의혹에 해명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도 황하 북부에서 조조의 군대가 원소를 견제하고 있었다. 즉, 원소가 먼저 남진하여 조조가 방어한 것이 아니라. 조조가 황하 북부에서 원소를 도발했고 원소가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해 대응하면서 관도대전이 시작됐단 말씀 =3=

그런데 전쟁이 시작되니 -- 대부분의 전투에선 대부분 조조가 승리했다. 원소는 백마벌에서 안량, 연진에서 문추를 잃고. 관도에선 조조의 1만 군대를 끝내 격파하지 못했다. 나중에 오소에선 순우경도 잃었고. 저수 등이 포로로 잡혀 죽었다. 원소는 10만이라는 병력이 무색하게 실적이 없었다.

반대로 조조는 계속 승전보를 울렸다. 일단 관도 전선에선 서황, 우금 등이 원소의 수송대나 병영을 기습해 큰 승리를 거두었고. 서주에선 장패가 지속적으로 청주를 공격해 청주가 수세에 몰렸다. 원소에게 호응해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킨 세력들은 이통, 만총 등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 원소의 고향인 여남에는 유비가 그쪽 황건적까지 동원해 허도를 위협했으나 (아마 원소와 내응한 여러 반란 사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위협적이었던), 이것도 조인에게 박살났다. 저수는 조조의 군대가 비록 수는 적으나 정예롭다고 평했는데, 과연 원소의 모든 군사 작전은 족족 실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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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의 군대가 취약했던 이유는 -- 원소가 공손찬을 199년 3월에 잡았는데 관도전쟁은 200년 2월에 벌어졌다. 공손찬은 유주의 맹장(猛將)으로 비록 패했으나 원소가 입은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원소가 올린 상주문에서, "(역적 공손찬과의 싸움으로) 전사자의 수가 과반에 이른다" 라고 인정했고. 기록에는 원소와 공손찬의 전쟁은 "서로 충돌한 들판이 피로 물들고", "풀 한 포기 남지 않았을" 정도로 지독했다 . 여기서 원소는 공손찬을 토벌하는 중간 사이에 국의 등 유능한 장군들을 숙청하기도 했고 =3= 저수, 전풍 같은 유능한 모사나 장군들도 관도전쟁에서 배제됐다.

원소는 아직 공손찬과의 싸움에서 입은 피해가 회복되기도 전에 성급하게 전쟁을 다시 일으켰고.. 전풍과 저수는 이런 상태에선 아무리 수가 많아도 조조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으나 원소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원소는 아마도 조조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전풍과 저수의 주장과는 달리) 상황을 더 불리하게 만든다고 판단하지 않았나. 여기서부턴 정사 삼국지, 후한서 등은 철저하게 전풍과 저수의 편을 들고 있으며, 원소의 단기전 판단이 틀렸다고 평합니다만..

전풍과 저수의 주장대로 장기전으로 갔으면, 하북도 회복이 되지만 남방(조조)도 회복된다. 관도전을 앞두고 조조도 마냥 쉰 것은 아니라 여러 제후들과 충돌해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으니. 만약 조조에게 시간을 준다면 관도전은 10만과 1만의 대결이 아니라 10만과 3만의 대결이 될 수도 있음을 원소는 걱정했던 것이 아닐까. 전풍과 저수는 제대로 된 10만으로 조조의 제대로 된 3만을 상대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나. 원소는 오합지졸 10만으로 조조의 지친 1만을 상대하는 편이 유리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론이지만 이런 원소의 계산은 틀렸다. 정사 삼국지에선 원소의 제장들이 조조의 제장들에게 털리는 기록들만 가득하다. 물론, 정사 삼국지가 위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므로 조조의 승리를 중점적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겠으나. 원소가 압도적인 병력 우위를 점하고도 조조를 압도적으로 제압하지 못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유능한 장교들을 숙청해 독일의 침공에 고생했던 스탈린처럼.. 원소가 너무 성급하게 유능한 인재들을 제거하여 군부를 레벨이 떨어지는 인사들로만 구성했고, 회복되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황하 이남까지 접수하려다 그만 사단이 났다 -- 이것이 관도전쟁의 본질이 아니겠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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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원소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나 -- 원소는 량주의 마등, 형주의 유표, 양주의 손책과 동맹을 맺어 조조를 포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소도 각지의 제후나 태수들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의 동맹으로 영입하려는 시도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일단 량주는 마등만 아니라 한수 등 많은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어 서로 견제하는 상황이었고. 종요는 마등을 설득하여 마씨 일족은 조조에게 붙었다. 손책은 급격한 세력 확장으로 양주 내부에 적이 너무 많았다. 곽가의 예측대로 장강 이북으로 영향력을 확장할 처지가 아니었는데 무리하게 나섰다가 암살... 그럼 남은 사람은 형주목 유표입니다만...

삼국지에서, 두 세력이 동맹을 맺어 제대로 협력한 역사는 없습니다. 일단 유표는 완성의 장수, 남양의 누규를 지원하는 형태로 조조를 견제했으나 두 사람 조조에게 투항하면서, 관도전쟁에선 역으로 유표가 견제를 받았다. 장사태수 장선이 조조의 사주를 받아 거병해 몇년째 유표를 괴롭혔고. 군사적 요충지인 강하(황조)도 손책의 계속되는 공격에 크고 작은 피해를 입어 도저히 북진할 여유가 없었다.

조조의 참모진은 원소의 동맹 세력이 원소를 지원할 수 없음을 정확히 계산했고, 더 나아가 원소의 동맹 세력을 이탈하게 만들었다. 즉, 외교전에서 원소는 조조를 상대로 지고 있었고 관도전쟁은 순수하게 원소와 조조의 진검승부로 양상이 흘러갔는데.. 조조는 삼국지 최강의 명장이고 원소의 능력으론 조조를 당할 수 없었다. 

아마도 순욱, 곽가, 가후 같은 사람들은 이런 전황 전체를 다 읽었고. 곽도나 심배 같은 사람들은 전략적인 판단이 부족하여 단순하게 병력 차이만 계산했던 것 같다. 정사 삼국지에선 조조가 원소를 의식한 기록은 많으나 원소가 조조를 의식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만약에 있으면 조조를 정통으로 삼은 정사 삼국지가 그걸 무시할 리 없다) .. 조조를 병력 우위로 잡을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이 교만함이 관도의 패배로 이어졌고 =3=

덧글

  • 2020/02/19 20:45 # 삭제 답글

    글이 중간에 반복되네요;;
    유표는 세력 내의 반란으로 못했다쳐도 손책은 진짜 조조가 운이 좋은 것 아닌가요?
    손가군이 올라오면 막을 병력도 없을 정도로 조조도 가용병력을 다 쓰고 있던 것 같던데요.

    관도대전은 아마 모두? 의 생각보다 조조의 승리가능성이 높았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원소의 이른 대응의 이유는 협천자로 인한 명분상의 하자로 인해 오래 끌면 역전으로 몰려 10 :3이 아니라 7:5 혹은 그 이상으로 본인에게 위험해질 수 있다는 데에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 말초 2020/02/20 08:11 #

    곽봉효는 손책이 북상할 수 없고, 암살 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거든요 - 이게, 아무리 봉효라도 설마 암살까지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겠냐. 구라가 섞인게 아니냐.. 라는 의혹은 요즘 삼덕들은 물론 the 배송지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우번도 손책이 평소 자신의 힘만 믿고 경호가 가벼운 상태로 사냥을 즐기는 행위를 몇번 경고했고. 진등은 진짜로 손책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요즘에도 국가의 정보 기관에서는 특정 국가의 특정 지도자가 암살되거나 시위, 군사 쿠데타 등으로 퇴진될 가능성을 감지하고 방치하거나 개입하거나 하거든요. 경우는 다르지만, 동탁의 패망을 계산한 사람들도 진짜 많았습니다. 사마중달도 제갈공명이 조만간 죽을거라 예측했고 =3=

    손책은 제가 따로 다룰 예정입니다만.. 기록에 구라가 있더라도 -- 남중국의 제후가 북상하여 허도를 공격할 여력이 없다, 정도는 이미 조조의 참모진들이 계산을 끝냈고. 그 계산이 정확히 맞았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이 시대는 기록이 없어, 조조의 참모진들이 어떤 근거로 그런 계산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봉효 정도 되는 사람이 조조 면전에 "손책은 올 수 없다" 라고 호언장담을 했다면.. 봉효만이 아니라 다른 참모진들과 치밀한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고, 그게 적중한 이상.. 손책은 실질적으로 조조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손책은 광릉에서 진등한테 졌고 -- 오나라는 체제가 훨씬 더 정비가 잘 된 손권 시대에도 합비 신성조차 넘지 못했습니다. 제갈각의 북벌에서 제갈각이 무려 20만 대군을 동원했는데도 합비 신성을 함락하지 못했거든요. 물론 손책의 시대와 제갈각의 시대는 같지 않고, 위나라도 제도가 정비됐으나. 오나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 손씨가 과연 허도를 공격할 수 있는.. 그런 국가적 역량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장안과 낙양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던 종요가 군마 2천필을 관도로 보냈다는데.. 정말 여차하면 사례주의 병력을 끌고 올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2020/02/19 23:31 # 삭제

    뒤의 합비 신성은 비교대상이 안 맞는다 생각합니다.
    못 뚫는 이유는 기병이 없고 공성이 어렵기 때문인데 이 시기엔 조조군도 기병이 별로 없고 거점이 될 성도 별로 없죠.

    그리고 제가 말초님 말씀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참모들 말 되게 신뢰하시고 결과론적이시네요.
    물론 곽가가 맞았기 때문에 걸린 것이겠지만 조조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진 아닌지 모르죠.
    쟤네는 참모지 예언가가 아닙니다.

    암살 예측 같은 건 의미가 없는 게 조조한테 궁중에서 반란 일으킨 사람 중 한명이라도 성공했으면 그걸 얘기했던 사람은 예언가가 되었을겁니다.
    다른 나라 얘기지만 알렉산더 같은 유형의 군주는 원래 죽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만 생사에 따라 달라지죠
    분석이 아니라 결과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죠.

    아 그리고 제가 손책을 이야기 한 이유는 정작 조조는 미친 개새끼라는 욕을 두번 하더라구요.
    아마 곽가의 발언이 이때 나온게 아닌가 합니다
    원소보다 더 강한 욕을 선사했다는 걸 어디서 봐서 그렇습니다.

    참모와 군주가 위험도를 다르게 볼 수 있긴 하죠.
  • 말초 2020/02/20 08:20 #

    손책 암살의 배후에 위나라가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건 건강실록이라는, 오나라의 역사서에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만.

    손책을 암살한 사람 중에, 허소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 이 사람이 진등의 인수를 받아 손책 암살을 모의했고, 결국 성공했죠.

    손책 암살의 주축이 된 사람들은 사족 허공과 엄백호의 잔당들로, 옛 주인의 복수를 위해 손책을 습격했습니다 -- 손책 특집은 나중에 할 예정입니다만. 양주 내부에 손씨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고 진등이 그들과 접촉해 암살을 시도했으며, 성공했다.. 라고 볼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이 당시 곽가는 사공군좨주, 라는 관직에 있었는데. 좨주는 제사에서 술을 따르는 사람이란 뜻으로, 조직의 총 책임자를 뜻합니다. 곽가가 조조 내각 참모진들의 총책임자였고. 진등이 손책 암살을 시도하고 있었다면, 분명 그 보고가 곽가와 조조에게 올라갔을 것입니다. 진등이 서주의 유력한 사족이었어도 다른 제후의 암살을 독단적으로 시도할 수는 없었고. 그럼 손책의 암살은 조조의 카운터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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