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가 없어 고생한 촉나라 N.O.T.E




그동안 너무 북조(北朝) 이야기만 했다 -- 균형을 맞추는 목적에서 촉나라 이야기도 조금 하지 않음 안될 것 같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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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나라가 인재가 없었다고 하는데, 촉나라가 망했을 당시 관료만 4만명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유비가 통솔했던 병력이 2만, 자치통감 기준으로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통솔했던 병력이 (최소) 4만이니 결코 적지 않다. 동맹인 오나라는 영토와 인구에서 촉나라의 2배 이상의 규모였으나 3만명 정도로 구성된 관료 조직을 운영했다. 제갈공명 생전 다섯, 강유 생전 여덞 차례의 북벌이 있었으니 익주의 역량을 하나에 집중하고자 거대한 관료 조직을 운영했던 것 같고. 한편으로는, 익주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익주에 지역 기반을 마련한 유비 정권의 현실상, 익주 사족을 감투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감투가 마구잡이로 내려졌던 것 아닐까.

과연 촉나라도 영웅이 적지 않았는데 -- 나헌, 곽익, 마덕신(마충) 같은 명장들이 있었고 나헌은 무려 육항을 상대로 영안성을 지켜냈다. 촉나라는 인재가 적은 것이 아니라 진도처럼 기록되지 않은 장군들이 있었거나. 남만과 오나라를 견제하느라 일부 장군들이 북벌에 참전할 수 없어 인재가 적은 것처럼 보이는. 그런 착시 현상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촉나라에 인재가 없었다면 진짜로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뭔가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의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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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나라 내각은 크게 4개의 파벌로 구성된다 -- 유비가 북방에서 모집한 공신 집단, 형주에서 익주로 이주한 형주 사족들, 그리고 익주에 지역 기반을 둔 익주 사족들, 마지막으로 적국에서 투항한 인사들. 위나라는 영천 사족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했고 오나라는 양주 사족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했는데 촉나라는 고위직 상당수가 익주 출신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일단 제갈공명은 서주 출신이고, 장완이나 비의는 형주 출신, 강유는 량주 출신으로 원래 위나라 장군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그림 같으나.. 정작 익주 출신들은 특별히 형주 출신 장군이나 승상을 미워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엄 등이 제갈공명의 실각을 시도했으나 이엄은 익주 출신이 아니었고, 익주 사족들은 제갈공명을 비호하며 이엄을 역으로 탄핵했다. 제갈공명의 권력은 조조나 사마사, 제갈각의 권력보다는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 그럼 왜 익주에 지역 기반을 둔 촉나라에서 서주, 형주, 량주 출신 인사들이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는가?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유비가 죽자 익주 사족들 몇몇이 반란을 시도했으나 결국 제갈공명이 진압하면서 한번 실력 행사를 한번 했고 -- 익주 사족들은 위나라와 싸울 의지가 없었다. 이 시대에 익주 사족들은 예언에 심취하여 (반면 제갈공명은 미신을 별로 믿지 않았다) 촉나라는 위나라에 망할 운명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등애가 성도에 당도하자 익주의 명사(名士) 였던 초주를 중심으로 항복을 간언했고, 유선이 그들의 의견을 채택하면서 촉나라는 비로소 사직의 문을 닫는다.

사실, 촉나라와 위나라의 국력차를 생각하면 익주파의 이런 비관론이 북벌을 몇차례나 일으킨 제갈공명이나 강유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일단 예언대로 촉나라는 진짜로 위나라에게 망했고 ㅋㅋ 남조(南朝)의 사족들은 북조의 사족처럼 유교 이념을 깊게 교육받은 사람들이라 대의명분이 확고한 조씨에게 투항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일부 포기하더라도) 황제를 섬기고자 했다. 형주는 이런 보수파 사족들을 조조가 털어갔고, 양주는 적벽대전을 계기로 그런 여론을 꺾었으나 익주는 그런 계기가 없었다. 유비에게 익주를 넘기려고 했던 장송도, 처음에는 조조에게 익주를 넘기려고 했었으니까 =3=

제갈공명 치세 약 10년, 촉나라 멸망까지 30년... 토탈 40년의 세월을 토탈 13번의 북벌과 그 사이에 있었던 각종 반란과 이민족의 저항, 위나라의 침략에도 묵묵히 유씨 정권을 지탱한 익주 사족들의 노고와 희생도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다만 초주 같은 익주 사족들이 너무 쉽게 항복을 결정한걸 보면 -- 역시 익주 출신을 고위직에 임명하거나 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들이 사족의 중론을 모은답시고 위나라에 항복이라도 하면 오나라 꼴이 났을테니.

덧글

  • 2020/04/05 20:57 # 삭제 답글

    다르게 보면 중앙의 형주 출신 관료들이 익주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실패한 것 아닐까합니다.
    오로 치면 양주 호족의 마음을 못 잡은 것이니..
  • 말초 2020/04/05 22:13 #

    남중국의 사족들은 후한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유교를 배웠으므로 황제와 국가에 대한 충성 관념은 분명 있지만. 한편으론 오랜 세월 중앙에서 소외됐으므로 (지역 차별도 심했습니다) 자기들 근거지에 황제 국가를 세워 용의 꼬리가 될 바에는 뱀의 머리가 되겠다는 야심도 있었습니다. 만약 후한 체제가 그대로 지속됐다면 주유나 육손은 후한의 관직 사회에서 사방장군 이상으로 승진하기란 대단히 어려웠을 겁니다. 악진, 여몽, 장비 같은 사람들은 어림도 없고요 (이 사람들은 후한 체제에서 중랑장만 되도 성공한 겁니다). 남중국 출신 인사가 위나라에서 대성한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그런데 전쟁이 지속되고 자기들이 세운 국가가 망할 것 같다. 투항하는게 가문과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겠다 싶음. 그럼 또 쿨하게 투항하는 그런 면도 있었습니다. 손권 말년에 수많은 사족들과 공신들이 위나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아서 손권이 고생했는데. 적어도 촉나라는 그런 추태는 보이지 않았으니 익주 사족들은 그래도 신하로서 양심은 지킨 것입니다 =3=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멸망처럼 신료들이 유선을 밤에 몰래 포박해 위나라로 넘기거나 그런 일은 없었잖아요? 유선이 신하들 군기 잡겠다고 얼굴 가죽 벗기고 그런 일도 없었고.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 토론한 끝에 항복을 결정하고, 그대로 집행하는.. 익주 사족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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