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라의 대의명분 N.O.T.E




문치(文治)의 전통이 강했던 중국의 역사 특징상 대의명분이 가지는 힘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중국 문명의 토대를 닦은 주나라도 군사력으로는 은나라에 밀렸으나 대의명분을 확보하여 결국 은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다. 일개 연주에 지역 기반을 둔, 소규모 제후에 불과했던 조조는 순욱의 계책을 받아 한나라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면서 위나라의 왕까지 될 수 있었고. 유비도 유씨 황족의 피가 흐른다는 그 하나로 황제까지 되지 않았던가. 반면 유비보다 훨씬 고귀한 가문이었던 원술은 유씨가 아니란 이유만으로 칭제(稱帝)의 값을 죽음으로 지불해야만 했고.

한편으로 손권은 조씨처럼 한나라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유비처럼 황족도 아니었다. 그래서 대의명분 싸움에선 삼국 중 가장 최약의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었고 오나라가 망하는 그 날까지 -- 국가의 철학적 정통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다 =3= 지금까지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손권이 손씨라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처럼 통했으나. 내막을 자세히 보면 오나라의 대의명분을 깎아먹은 주범은 바로 손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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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년,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나라 조정은 항복을 주장하는 신하들이 여당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일단 군사적으로도 조조가 압도적으로 강한 것도 모자라 황제의 신변까지 확보하면서, 그리고 조조는 공식적으로 한나라의 승상이라 -- 명분으로도 손씨가 조씨에게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항복론자들은 원래 북중국에 지역 기반을 두었으나 난리를 피해 양주로 이주한 사족 출신들이 많아서. 이들 다수가 문(文)으로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학자들이라 손권은 이들의 이론에 휘말릴 처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유가 등장해 항복론자들의 이론을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명분을 만드는데 -- 조조가 한나라의 승상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역적이라는 것. 그리고 이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었다. 동승의 의대조 사건. 양표 등 한나라 고위 관료를 상대로 가해진 가혹한 고문 등을 보면 조조를 한나라의 수호자로 인정하기에는 미덥잖은 구석이 있었다. 결국 적벽에서 손씨가 승리하면서, 주유는 208년 체제를 실력으로 입증했고 오나라는 솥밭의 세 다리 중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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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208년 체제는 불과 8년만에 무너지게 되는데 이 체제를 무너뜨린 사람은 바로 손권 =3= 적벽대전이 끝난 후에도 손권은 합비, 유수구 일대에서 치열하게 조조와 교전했지만 전세는 손권에게 불리했고. 손권은 216년에 처음으로 조씨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고 항복 의사를 타진한다. 그것만 아니라 천명이 조조에게 있음을 설명하여 조조에게 황제 즉위를 권고하기도 하는데.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전상의 거짓 항복이고 조조도 손권의 항복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으며 손씨 일족을 조조에게 인질로 보내거나, 영토를 양보하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신하가 적군을 속이기 위해 항복으로 기만하는 일과 일국의 군주가 적대국의 군주에게 항복의 예를 취하는 일은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손권은 이후로도 몇차례에 걸쳐 항복 의사를 타진하면서 자신의 위엄을 깎았다 - 219년에는 형주를 빼앗기 위해, 한번 더 조조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는데. 조조는 한나라의 역적이니 항복할 수 없다는 208년의 선언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뒤집은 것이다. 특히 형주는 동맹국인 촉나라의 영지였단 점에서, 위나라와 비밀 동맹을 맺고 형주를 공격한 행위는 적벽전쟁에서의 명분은 다 구실에 불과하고. 결국 손씨 일족이 지금까지 조씨 일족을 상대로 치룬 전쟁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행위에 불과했음을 고백한 것이나 같았다.

여기서 손권과 유비의 입장 차이가 드러나는데. 유비는 후한 말기의 난세 1세대로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제후들이 연맹하고, 조조가 효헌황제의 신변을 확보하고 원씨 일족이 명망으로 큰 세력을 일구고 원술이 칭제로 몰락하는 역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대의명분이 가지는 힘을 알고 있었다. 장판파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어도 조조에게 거짓이라도 항복하지 않았다. 반면 손권은 한(漢)의 권위가 쇠락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난세에 등장했다. 한(漢)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노숙, 여몽 같은 인사들이 대도독에 임명됐다. 동맹을 쿨하게 깨는 행위도, 생존을 위해 조조에게 머리를 숙이는 행위도 "상황이 잘 풀리지 않음 그럴수도 있지" 라는 가벼운 태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손권이 아무라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어도 중국이 문치(文治) 전통에 기반을 둔 명분 사회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이렇게 계속되는 항복 남발은 결국 손권의 목덜미를 잡고야 마는데.. 220년, 다른 사람도 아닌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위나라 황제로 등극한 조비가 내린 구석(九錫)과 오왕(吳王)의 자리를 아무런 의심 없이 쿨하게 받음으로서. 오나라는 그나마 있던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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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조비의 계략이었다. 한(漢)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는 여전했고 220년에 조조가 사망하자, 조비와 그 측근들은 혹시 과거에 여씨 일족이 여태후의 죽음을 기점으로 몰락한 것처럼. 유씨 부흥을 명분으로 한 대대적인 저항군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직 천하는 통일되지 않았고 (비록 형주를 잃었다지만) 유비는 건재했다. 불과 1년 전에, 위풍이 한나라 재건을 명분으로 업성을 탈환하려는 음모를 세우기도 했다. 조운 등 촉나라 군부의 주요 인사들도 오나라를 향한 복수 대신, 위나라 공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했고 이것은 조비에게 큰 기회였다. 조조가 사망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조비는 아버지가 물려준 위나라 내각의 지원를 받아 황제에 등극할 수 있었다.

조비가 걱정했던 일은, 혹 손권이 한(漢)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명분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사태였다. 그러나 조비가 손권을 왕에 임명하고 손권이 그걸 받으면 그럴 걱정이 없다. 손권이 조씨의 신하임을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천하에 선포되기 때문이었다. 둘이서 함께 공공의 적인 관우를 토벌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오왕의 자리와 함께 내려진 구석... 순욱이 조조의 구석 수여를 죽음으로 반대한 일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 구석이 비록 공이 많은 신하에게 주는 특전이라고는 하나, 본질은 그 신하가 비정상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적 인증이었다. 그런데 손권은 이걸 받았다. 보통 왕에 봉해진 사람은 3번 사양하는 겸양의 덕을 보여주는데 그런 형식도 과감하게 생략했다.

사실, 손권에겐 명분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오나라의 참모들도 멍청하지는 않아서 - 손권이 조비가 책봉하는 왕을 받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다만, 조비도 황제에 올랐고 유비는 이미 황제가 됐으니 손권의 격이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 손권이 왕 대신에 한나라의 상장군(上將軍), 구주백(九州伯)에 취임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구주백에서 구주(九州)는 아홉개의 주(州), 고로 중국을 의미하고 백(伯)은 백작, 우두머리, 맏이, 최고 지방관을 의미한다. 즉 중국을 아우르는 백작이란 뜻으로 상장군이란 직책과 결합하여 손권이 한(漢)의 신하이자 수호자임을 나타내는 정치적인 의미가 강한 벼슬이었다.

그러나, 이 구주백은 전례가 없었고 왕이나 황제보다 격이 낮은 것도 사실이었다. 결정적으로 손권 스스로가 썩 좋아하지 않았다. 손권은 "구주백이란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과거 한고조도 항우에게 한중왕을 받았지만, 결국 항우를 토벌하지 않았냐. 원래 이런거는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거야" 라는 굉장히 쿨한 태도로. 결국 조비가 하사한 왕과 구석을 받아 오왕(吳王)에 등극한다. 이후 조비는 손권에게 인질과 영토를 요구했으나 손권은 거절했고, 격분한 조비가 군대를 일으켰으나 이것도 격파하면서 다시 한번 더 자신이 삼국의 한 축을 담당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손권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실리적인 행동이 나라에 도움이 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양주의 사족들은 손권과는 다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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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의 오왕 등극 이후로, 오나라에서는 내각과 군부의 주요 인사들, 국경을 지키는 장군들이나 그들의 일족이 위나라에 투항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투항하지 않은 인사들도 자신의 권력만 믿고 여러 갑질과 횡포를 저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당의 아들 한종, 전종의 일족이 위나라에 투항했으며. 감녕, 반장 등이 자신의 공로를 믿고 살인, 약탈 등 법을 어기는 행위를 일삼았다. 어디까지나 유명한 사람들만 나열한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 관료들의 죄나 투항 행렬까지 합치면 사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공신 자제들의 횡포가 굉장히 심했다.

몇 명은 손권이 공적를 아껴 용서했으나 몇명은 정도가 너무 심했던지 가문이 문을 닫을 정도로 중벌을 받기도 했는데... 과연 용서한 것이 치죄를 안한 것인지, 못했는데 안한 것으로 포장한 것인지 --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왕에 취임하면 자신의 권위가 강해질거라 믿었던 손권의 예측과는 달리 오나라 내각은 적벽대전 전보다도 더 심각하게 손씨의 통제력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이궁의 분열도 이렇게 오만한 지배 계급을 일거에 정리 및 재편하려는 손권의 승부수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로 오나라는 혼란했다.

그러나 오신(吳臣)들의 입장에서 보면 손권은 공식적으로 위황제(魏皇帝) 조비의 책봉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조비는 효헌황제 유협의 선양을 공식적으로 받았으니 위나라는 한나라를 계승한 정통 국가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 그들의 진정한 주인은 손권이 아니라 조비다. 손권은 조비의 신하에 지나지 않고 조비의 명을 받아 잠시 양주 일대를 위임 통치하는 것이다. 일제 시대에 비유하면 손권은 조선 총독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 본토에 천황이 있는 것처럼, 조비가 낙양에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오나라를 버리고 위나라로 귀순하는 행위는 국가를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거짓말 좀 보태) 진짜 주인을 찾아가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현실은 이것보다 더 복잡했지만 이런 명분이 통하도록 길을 깔아준 사람은 바로 손권이었고, 고로 오나라의 자체 분열은 손권의 책임도 상당히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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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의 입장에선 원래 오나라가 가지고 있는 명분이 얼마 되지 않으니 실리를 추구하는 대외 정책을 통해 나라를 지켰다고 믿겠으나 (그리고 이 주장도 어느 정도는 진실한 주장이다), 가뜩이나 없는 명분을 눈 앞의 이익 앞에 너무 쉽게 내주면서 -- 적벽대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행동이 대의(大義)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손씨의 지배권을 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너무 직접적으로 과시했다. 유교 사회에서는 군주와 아버지가 각기 국가와 가정에서 모범적인 행동을 보이고, 아랫 사람들이 그 행동을 따라하면서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데 손권은 이익을 무형의 가치를 버리는 모습을 아랫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러니 사족은 물론 한미한 출신의 장군들도 손권에게 등을 돌렸다. 원래 한미한 출신의 관료들은 그들의 권력이 군주에게서 나오므로, 군주를 보호하는 근왕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결과 그들들도 자신의 실제적인 이익을 위해 충성, 의리 같은 무형의 가치를 버리는 행동으로 손권에게 응답했다. 결국 손권은 252년에 사망할 때까지 다시는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지 못했으며 이궁의 변으로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잡는듯 했으나 -- 그 후유증과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손권의 실리적인 정신은 조씨와 유씨 사이에서 이제 막 아버지와 형의 대업을 이어받은 손오(孫吳)의 생존과 부흥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맞지만. 오왕에 책봉된 일은 분명 큰 실수였다. 손권의 실리적인 정신이라면 왕이라는 그 직함에 연연하지 말고 한나라 상장군, 구주백으로 끝까지 한(漢)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편이 더 좋았었을 수도 있다. 손권이 왕이 아니라서 이릉에서 유비를 격파하고, 황제가 아니라서 조비의 침공을 훌륭히 막은 것은 아니니까. 이때는 오히려 오나라의 문무관료들이 단결하여 손씨와 함께 외적의 침공을 막아냈다.

그렇다면 유명무실한 왕이나 황제의 자리보다 확실히 이름값을 하는 자리에 취임하는게 장기적으론 손씨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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