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라와 형주 N.O.T.E







기왕 오나라 이야기가 나왔으니 글을 쓰는 과정에서 편집된 것들을 모두 모아보기로 =3=


형주 대여론

쉽게 말해서, 형주의 소유권은 손오(孫吳)에게 있으나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해 유비에게 양도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노숙이 최초로 제창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억지다. 일단 역사적으로 손씨는 관우의 통수를 치기 전까지, 형주 전역의 지배권을 완벽하게 확보한 역사가 없었다. 흔히 형주목 유표가 문(文)과 정치에만 밝고 군사에 대한 일은 잘 모른다고 알려졌으나, 유표는 손씨가 삼대에 걸쳐 공략했어도 결국 도모하지 못했던 강성한 제후였다. 강하를 함락하는데 손씨는 16년의 세월을 소모했으며 결국 강하태수 황조를 잡기는 잡았으나, 그것도 강하의 일부 지역에만 손씨의 지배권이 닿았던 모양이다.

즉, 역사적으로 형주에서 손씨가 요구할 수 있는 합당한 지분는 강하군 일부와 주유가 조인에게서 탈환한 강릉(남군)에 지나지 않았더란 말씀 =3= 차라리 조조가 형주의 소유권에 대해 더 많은 권리가 있었다. 일단 한나라 황제를 대리하는 한나라 승상의 지위로, 형주목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했으니까.

유비는 (비록 거절했지만) 유표가 후계자로 직접 지목했고, 유기의 신변을 확보했다. 형주의 백성들은 조조를 피해 유비와 함께 도주했고 장사, 무릉, 계양, 영릉의 태수들은 손권이 아닌 유비에게 투항하면서 이 지역은 오롯하게 유비가 실력으로 확보한 땅이었다. 그러나, 형주 대여론은 강릉(남군)은 물론 이 땅까지 모조리 본래 손권의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전제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고.

정사 삼국지는 관우와 유비가 형주 대여론을 두고 감정적으로 억지를 부리거나, 폭력적으로 무마하려는 모습만 보여준다. 그러나 유비와 관우는 둘째치고, 그 휘하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있었을텐데 그들은 형주 대여론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열심히 조사했을 것이다. 이릉대전을 앞두고 제갈근이 유비에게 보낸 편지도, 오나라의 과오를 간접적으로 인정하지만 그래도 국적(國賊)은 조위(曹魏)이니 오나라 대신 위나라를 쳐달라는 억지스런 내용이었다.



형주 정벌

그럼 손씨는 왜 이렇게 형주에 집착했나 - 손권도 처음에는 동맹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고, 서주 진출에 나름 열중했다. 그런데 막상 위나라를 상대로 장강 이북에서 붙어보니 도저히 답이 없더란 것이다. 손권은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했어도 위나라의 강력한 보기(步騎)에 패배를 거듭했고, 215년에는 합비성 전투에서 불과 7천의 병력을 가진 장료에게 10만 오군(吳軍)이 참패하는 굴욕을 겪었다.

서주는 평야 지대라 공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보병과 기병이 요구되었다. 위나라는 북방 이민족의 기병대를 수입할 수 있었고, 기병 전술의 명장들이 많았다. 앞서 말한 장료도 바로 여포의 부장이었다. 그런데 오나라의 지역 기반인 양주는 기병을 육성하기에 적합하지 못한 땅이었다. 이때의 양주는 아직 개척되지 못한 정글 지역이 광활했고 -- 사령관의 전투 역량을 비교해도 손권은 조조를 넘지 못했다. 여기다가 오나라 보병이 위나라 보병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지도 못했고 =3=

오나라가 세력 확장을 할 수 있는 지역은 그럼 오직 형주만이 남는다. 만약 손권이 형주를 확보한다면, 유비가 입촉(入蜀)에 성공했던 것처럼 그대로 익주까지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손권은 남만의 반란군과 외교적으로 접촉하기도 했다). 그럼 남중국 전체가 다 손씨의 영토가 된다. 혹은 관우가 북진하여 위나라를 크게 타격했던 것처럼 자신도 형주에서 북벌군을 일으켜 요행히 몇번의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대로 허도나 낙양을 확보할 수도 있다. 만약 한나라 황제의 신변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면, 손권은 한나라의 수호자로 유비, 조조를 능가하는 명분을 쥐게 된다.



형주 활용

그럼 오나라는 명분까지 포기하며 얻은 형주를 제대로 활용했을까 -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못했다. 먼저 형주는 유표가 치적을 통해 많은 병력과 물자를 비축한, 굉장히 부유던 주(州) 다. 그러나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형주는 조씨, 유씨, 손씨를 따지지 않고 휘둘리며 적벽대전, 서촉 정벌, 번성 전투.. 이 외 각종 크고 작은 전쟁과 난리에 휘말렸다. 고로, 손권이 형주를 확보했을 당시 형주의 경제력은 옛날만큼 강성하지 않았다.

원래 여몽은 자신이 별도의 군(軍)을 이끌고 조조가 지배하고 있던 양양까지 확보하고자 했다. 고로, 손권은 관우만 통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비밀 동맹이었던 조조도 함께 통수를 치겠다는 국제적인 스케일로 형주를 탈환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양양 공략은 취소되었다. 형주의 역량을 북벌에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번성과 양양 같은 형주 북부를 확보해야만 했는데 관우도, 여몽도 결국 얻지 못했다. 다만, 손권은 조조가 죽고서 조비의 판단 실수로 양양을 아주 잠시 확보했는데 -- 다시 위나라의 반격으로 잃었다. 이로서 손권이 형주의 지리적 이점을 100% 활용할 수 있는 길은 오나라가 망하는 그 날까지 완전히 막혔다.

이후에도 오나라에선 무려 주연이나 육손 같은 명장들이 형주에서 위나라를 공격하는 시도를 하긴 했었다. 그러나, 위나라가 다시 양양을 내주는 일은 없었다. 관우 같은 용장(勇將)도, 육손 같은 지장(智將)도 형주 남부의 전력만으론 북중국이란 거대한 벽을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형주 전체도 아닌 남중국의 힘만으로 북중국을 정벌한 사례도 없었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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