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을 수 없었을까 N.O.T.E





나무위키에서 동탁 항목을 보면, 동탁이 개혁자로 재평가를 받을만한 정견(政見)이나 계획이 없었다.. 라고 합디다. 그리고, 만약 어떤 정견이나 시대 정신이 있었다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을 것이라.. 이라고 합디다 (2).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백성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다는 전략은 제후들에게 큰 도움이 되진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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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야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가 바로 유주목 유우일텐데. 백성을 긍휼히 여긴다는 점에선 유우가 유비보다 더 뛰어났다. 유비가 진짜 인애(仁愛)로 백성을 보살핀 제후인지는, 유비가 위선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토도 있으나. 유우는 오환, 선비족 같은 이민족에게도 덕(德)을 베풀어 일대 만민의 사랑을 받던 모범적인 학자였다. 그래서 유우의 휘하에는 사람들이 모여 전성기에는 그 군세가 십만에 달했으나 -- 이런 유우의 위세는 공손찬의 공격 한방에 와해됐다 (계성 전투).

이때 공손찬은 불과 정예병 일.백.명.을 지휘했고.


즉 -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십만을 모았으나 전쟁은 못하는 학자

VS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해 일백명 모았으나 전쟁은 잘하는 장군


붙었더니 장군이 이겼더라. 유우는 그대로 공손찬에게 사로잡혀 조리돌림 당하고 참수 ㅠ

이러니 일선 제후들도 백성들의 마음을 구할 시간에, 장졸(將卒)의 마음을 얻는데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동탁이나 이각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문제였지만. 원래 전한(前漢) 시대부터 중국은 인간의 품성은 계급에 의해 선천적으로 결정되며 하류 계급은 말로서는 교육할 수 없고 처벌로만 교육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 동탁 같은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덧글

  • 2020/06/21 20:5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0/06/22 22:5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20/06/22 21:12 # 삭제 답글

    이때 그런 정치가 없었조, 백성을 사실상 말 통하는 가축으로 알았고, 저도 주워들은 것이지만 유비가 도망칠 때 백성들과 같이 도주한 게 그 백성들이 자원이기때문이라고 냉소적으로도 볼 수 있더군요....
    백성들을 좋게 생각하는 민본주의적 사상과 국가는 좀 극단적으로 보면 송나라와 성리학의 탄생까지 기다려야 되죠...
  • 말초 2020/06/22 22:54 #

    오랫만입니다.

    유비가 백성들과 함께 도망친건, 제가 보기에도 조조를 도발하기 위한 (혹은 자신의 명분이 조조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유비가 그걸 의도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고. 한편으론 유비가 자기 목숨을 걸면서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이동했다는 것도 사실이라. 정치적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어도 유비의 용기는 충분히 리스펙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전에, 원소의 아들 원상이 오환족에게 망명할 그때에도 -- 하북의 백성들이 원상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었습니다. 이건 무려 중국을 버린 거니까, 유비의 피난민보다 더 비장하고 더 스케일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조조가 정말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음을 실감할 수 있지만 결국 천하는 조조가 잡았더란 것이지요. 아무리 백성들이 수가 많아도, 조조나 이런 장군들은 소수의 정예병으로 다수의 오합지졸을 격파하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고. 전쟁에서 져서 세력이 와해되면 방법이 없으니까요.
  • 그거 2020/06/25 15:24 # 삭제

    유비의 정치적 목적과는 상관 없이 잡히면 죽는 상황에서 거추장스러운 짐을 달고 갔다는 것 자체가 존경할 만한 요소 아닌가요.
  • 말초 2020/06/25 21:26 #

    To. 그거

    네, 저도 그건 충분히 존경 받을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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